황희선
“자연을 경제의 새로운 범주로 인정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꼴이다.
“~하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지.”라는 소위 ‘이명박 댓글놀이’가 유행하고 있을 만큼,
경제파시즘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이 출현하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 쾌적한 환경, 건강한 국민!!’
대선 당시 한나라당이 환경 분야 공약으로 내놓은 슬로건이다. 참 간단하면서도 좋은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슬로건을 이루는 여섯 개의 단어, 그리고 그 단어들의 조합은 엄청나게 복잡한 역사를 담고 있다. 이 슬로건의 문제는 차기정권이 그 말을 실현할 수 있는 행정 집행 의지나 실질적 예산이 없다거나,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다.
‘경제정책’만 있는 ‘환경정책’
이를테면 ‘아름다운 자연’과 같은 말은 산업화가 한참 진행되던 근대에 문명의 공간으로부터 탈출하여 스스로를 치유하려 했던 유한계급이 자연을 심미적인 관조의 대상으로 발명해 냈음을 보여 주는 말로 읽을 수 있다. 관조란 삶의 필요로부터 벗어난 순간에 발휘되는 능력이다. 생계가 어려운 사람이 관조의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이들에게는 도무지 마련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왜 ‘자연’을 수식하는 형용사가 하필이면 ‘아름다운’인가? 이 말은 ‘자연’이 어떠해야 하는지 규범적인 함의를 담고 있다. 따라서 두 단어의 조합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가령 우리는 이명박 당선자가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청계천 녹화 사업에서 얼마나 많은 영세사업자들이 삶의 근거지를 박탈당했는지 알고 있다.
차기 정권의 ‘환경정책’에 대해 비판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왜냐하면 ‘환경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했던 정책들을 보면, 실질적으로 ‘환경정책’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냥 ‘정책’만 있다. 좀 더 정확히는 ‘경제정책’이다. 없는 것에 대해 어떻게 비판을 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바로 그 ‘없음’이 무엇을 보여 주는가를 분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환경’이라는 말은 무얼 뜻하나? 우리말의 용법상 ‘환경’이라는 말은 ‘환경보호’, ‘친환경’, ‘환경오염’과 같은 말들에 사용된다. 한편으로 이 말은 경부운하 건설을 주장하는 이명박 당선자를 타임지가 ‘2007 세계 환경 영웅’으로 선정했을 때, 그리고 747인의 ‘환경인’이 지지선언을 했을 때 사용되었던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 나는 ‘환경’이라는 말에 인용부호를 넣어서 쓸 수밖에 없다. ‘환경’이라는 말은 항상 논쟁을 개시하는 말이고, 따라서 논쟁의 장소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말이 일컫는 대상은 단일하지 않다. 무엇이 ‘환경’의 이름으로 논쟁의 장에 들어오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내게는 그 논쟁의 장이 ‘정치’다.
이명박의 대운하 구상은 가공된 친환경 일색이다.
두 가지 정치
‘환경’과 ‘정치’가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정치 활동의 고려 대상이 되어야 할 주제 속에 ‘환경’이라는 하나의 주제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환경’문제가 기존의 정치논리로 해결 불가능한 지점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실질적으로 ‘환경’과 ‘정치’가 외따로 존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두 영역 모두 삶의 구성에서는 핵심적이지만, 삶은 독립적인 영역들로 분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환경문제’는 두 개념 모두의 실패를 보여 준다.
정치는 함께 사는 삶의 형식과 가치들을 발명하고 실천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단일한 개념은 아니다. 우리는 정치에 대해 두 가지 상을 가질 수 있다. 우선 정찰(police)의 정치. 공동체의 원형에 대한 특정한 상을 기반으로 하여, 그 원형을 이상적인 형태로 실현시키기 위한 활동을 일컫는다.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옳은지는 이미 ‘합의’되어 있으며,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절차와 분배만이 고려된다. 이와 대비되는 민주주의적 정치는 정찰의 정치가 내세우는 공동체의 ‘원형’에서 고려될 수 없는 부분들이 고려되기 시작하는 과정이다. 즉, 민주주의는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옳은지에 대해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행위이며, 이미 ‘합의’된 가치척도 내에서의 다수 입장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자크 랑시에르라는 프랑스 정치철학자는 민주주의가 진정한 정치라고 주장하며 정치가 발생하는 순간에 유일하게 힘을 발휘하는 개념은 평등이라고 본다. 발화자는 어떤 것이 좋고 옳은지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권리의 측면에서 평등하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는 만큼이나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다른 무언가를 주장할 평등 또한 제기해야 한다.
프랑스 혁명 당시 법정에 출두했던 블랑키라는 사람에게 판사가 “직업은?”이라고 묻자 “프롤레타리아”라고 대답했던 일화가 있다. 물론 프롤레타리아는 ‘직업’이 아니다. 블랑키는 정찰의 논리를 반영하는 직업을 자신의 신분으로 받아들이는 데 저항했던 것이다. 그러나 판사는 법원 서기에게 프롤레타리아를 새로운 직업으로 인정하고 기록하라는 지시를 했다. “환경과 경제는 공존할 수 있다.”는 말에서 나는 이런 장면을 연상하게 된다. “당신이 원하는 경제정책은 어떤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살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자연을 경제의 새로운 범주로 인정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꼴이다. “~하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지.”라는 소위 ‘이명박 댓글놀이’가 유행하고 있을 만큼, 경제파시즘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이 출현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황제가 되길 원하는가?”라는 기사 표제가 등장하며,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견제책인 3권분립마저 위태롭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정부 조직 개편안을 살펴보면 실감할 수 있다. 가령 인수위는 인권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바꾸겠다는 안을 내놓았다. 인권위가 독립적인 위상을 유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비판에 대한 인수위 대변인의 답은 한 마디로 놀랍다. 인수위는 인권위가 “현재의 헌법체계에서 3부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모호한 법적지위의 조직”이라는 점을 고민했으며, “독립성은 업무수행상의 독립성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한 마디로 3부는 ‘최소’ 조건이 아니라 유일하게 타당한 위치이며, 인권위가 정책실행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말하는 셈이다.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정찰만이 있다.
개발과 추방
차기정권의 공약 중 ‘환경공약’을 살펴보자. 서로 다른 부처와 영역들을 통폐합하여 일관된 ‘국가경영시스템’을 구축해야 하고, 도시를 생태도시로 ‘리모델링’해야 하며, 대안에너지나 자원순환책은 다 ‘경제’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예컨대 ‘신재생에너지 산업을 신 성장동력으로 육성’과 같은 공약에서). 물론 독일과 같은 다른 국가에서는 3분의 1 규모를 완성하는 데도 20~30년이 걸린 운하를 4년 안에 완성하겠다는 경부운하 건설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농지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대법원의 관문을 넘었던 새만금 사업에 대해서는 70퍼센트를 복합산업단지로 개발한다고 한다. 수도권 개발 규제도 대폭 완화될 조짐이다. ‘경제’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을 경우에만 ‘환경’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관조의 대상으로 존재할 수 없거나 경제 가치를 갖지 않는 경우에는 ‘환경’에서 추방된다. 도시재개발의 고급화(gentrification) 전략 속에서 심미적 관조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상업공간이나 부동산 투자의 공간이 될 수 없기에 경제 가치를 창출해 내지 못하는 빈민촌이 철거되는 것을 보라. 빈민촌은 사회의 구성 영역이 아니라 재개발이 필요한 ‘환경’이다. 경부운하는 기존의 삶의 터전을 또 다른 ‘환경’으로 만들겠다는 개발안이다.
새만금 사업에서 죽음을 맞이한 수많은 생명체들, 깎여 나가는 산들, 해양 및 갯벌 살림에 보탬이 되는 밥이었지만 정화해야 할 쓰레기가 되는 강의 유기물질들, 이들 모두는 빈민이 도심에서 추방되는 것처럼 추방되어 갈 곳이 없다. 인간이라는 공동체에서 추방되는 ‘환경’이 되는 것도 서러운데, 아름답거나 경제 가치를 갖는 한에서만 보존될 필요가 있는 ‘환경’에서도 추방된다.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조차 되지 못하므로, 묘지 이외에는 아무 터전을 갖지 못하게 된다. 그 다음으로 추방되는 것은 삶의 터전을 상실한 어민들, 즉 사람이다. ‘환경’은 사실 어떤 주체를 ‘둘러싸는’, 주체의 주변에 존재하며 주체와는 구분되는 무엇을 일컫는 말이다(‘상호작용’을 이야기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환경’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환경문제’가 보여 준다.
착취가 아닌 공존의 장으로
‘환경’이라는 말은 현재의 시점에서 ‘환경문제’라는 말에서와 같은 용법을 지닐 때만 평등하고 옳은 것이 될 수 있다. ‘환경’은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협소한 ‘정치’와 ‘경제’, ‘공동체’ 개념의 실패를 보여 주며, 그 외부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인식시키는 문제들을 제기하며 등장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름답거나 쾌적한 ‘환경’이 아니다. 그보다는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생물이든 비생물이든)이 ‘환경문제’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는 정치행위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통의 장소에 거주하고 있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이 공통의 장소를 어떻게 모두가 더욱 살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가 고려되어야 한다. ‘착취’와는 달리 평등한 삶을 의미하는 ‘공존’은 무엇보다도 공통적인 민주주의적 정치의 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민주주의는 경제만큼이나 경제 이외의 것이 동등한 가치로 받아들여질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황희선 redscaled@naver.com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 출처 및 링크 : 함께사는길 2008년 2월호 http://hamgil.or.kr/bbs/zboard.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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